28살, 대기업 3년 차 인재개발팀 주임 시절. 퇴근 후면 나는 성수동에서 어김없이 10분을 걸어 2호선 지하철을 타고 11개 노선을 지나 강남역으로 향했다. 그 일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어김이 없었다. 야근을 하거나 회식하는 날을 제외하면 그렇게 퇴근 후 다시 강남역 영어 학원으로의 출근이 이어졌다.

이런 스케줄 속에서는 문제는 저녁밥이었다. 퇴근 후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끈 회사원의 저녁식사는 언제나 테이크 아웃된 원조 김밥을 하나였다. 빠듯한 시간 탓에 그렇게 사둔 차가운 김밥을 강남역에서 학원까지 가는 길에 걸어가며 먹는 것이 내 저녁이었다.

그 혹독했던 고3 수험생 시절에도 책을 보며 밥을 먹을지언정 저녁은 항상 앉아서 먹었었다. 1분 1초가 아깝던 그때도 식사시간은 그나마의 휴식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강남역 길거리 서서 먹는 김밥 식사라니… 그렇게 바쁜 걸음으로 돌돌 말린 은박지를 한 끝으로 삐져나온 김밥 꽁무니 한 개를 입에 먹고 우걱우걱 씹고 있노라면 어떤 사람들과 눈이 딱 마주치는 경험을 자주 하곤 했다.

그녀들은 뾰족구두에 화장을 곱게 하고 맵시 있는 옷을 빼어 입은 여자 회사원들이었다. 그 여자 회사원들은 걸어가며 김밥을 먹고 있는 나를 흘끔거렸었다.

 ‘고시생인가, 취업 준비생인가?, 무슨 김밥을 걸어가며 먹냐?’

 그녀들의 속마음이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문득 나도 정말 궁금했다.

‘나도 회사원인데, 나도 강남역 이 거리의 수많은 회사들처럼 대기업에 다니는데 도무지 나는 왜 이러는 거냐, 이은영 너 도대체 뭔데!”

스물 예닐곱 아직 결혼도 안 한 나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의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퇴근 후면 체력적으로 이미 몸의 에너지는 방전 상태이다. 그 상태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저녁은 김밥으로 대충 때우고 집과 정반대 방향의 강남역 영어학원으로 가는 나.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사서 고생 모드를 선택했을까? 게다가 당시 내가 영어공부를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한 두 달도 아닌 꼬박 2년 가까이 이 생활을 반복했었다. 영어 다음은 책이었다. 새벽잠을 쪼개고 주로 지하철 안에서 집필 작업은 이루어졌다. 출퇴근 길 떠오르는 글감들을 포스트잇에 메모했다가 틈틈이 원고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총 3권의 책이 부지런하게도 출간되었다. 휴… 이쯤 되면  그렇게도 부지런히 달려오던 지난 시간의 노력은 이제 멈출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또다시 마찬가지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번엔 뭘까? 격주 토요일 주말이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마련해 역시나 집과 반대 방향인 역삼동으로 향해 세계 최고 지성들이 작성한 논문을 기반으로 공부한다. 신병철 박사의 중간계 세미나가 그것이다. 실무와 학문의 딱 중간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이끌어내고 행동하게 만들고,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가는 지점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시간이다.

10년 차 직장인이 기꺼이 주말을 내어 포기한다는 것은 이것에 대단한 열의와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 10년 차는 일단 서른이 넘었으므로 체력적 한계를 이미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오랜 회사생활 동안 딱 주 5일 일할만큼의 에너지 양만을 비축하게 된다. 그나마 금요일 오후 4시를 넘기면서 에너지의 총 양이 고갈되어 토요일 공부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10년 차들은 회사에서 꽤 일을 많이 하는 헤드헌팅사에서도 가장 몸 값 높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주중에 그 일을 다 소화하며 주말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서른 넘어 토요일 점심은 어김없이 또다시 김밥을 먹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소풍이면 먹었던 김밥을 성인이 된 지금은 무엇인가 애쓰며 공부할 때 주로 먹는 음식이 된 것이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소풍 갈 때 김밥을 먹었다

어른이 된 지금 김밥은 애쓰며 공부할 때 먹는 음식이다

공부할 때면 김밥 한 줄로 걸어가며 점심을 때우지만 이상한 포만감을 경험하곤 한다. 정신적 공허함이 채워져서 일까? 무기력과 허무함, 그리고 소진 증후군. 그렇게 치열한 주중을 보낸 주면 더더욱 공부하는 주말이 필요하다. 정신적 포만감을 위해 시간을 쪼개 배는 가벼운 김밥을 먹이지만 머리와 가슴이 부르다. 그래서인지 이런 내겐 직장인들의 지긋지긋한 고질병인 월요병이 없다. 월요병에 시달린다면 혹시 공부하는 주말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알고 있다. 간신히 일할 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직장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생계의 고단함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권하는 일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하지만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영혼 없는 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공부의 음식, 김밥을 먹는 것이다. 화려한 레스토랑에서의 근사한 식사가 아니더라도 집에서 만든 영양 만점의 건강식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채워짐. 아마도 이번 주 주말 점심은 가벼워진 영혼의 무게를 채우러 또 김밥을 먹을 것 같다.

선택칼럼니스트 이은영
dreamleader9@naver.com
Facebook: @glamjulie